김춘산
녹둔도가 그려진 경흥부지도
연려실기술에 실린 녹둔도에 관한 기록
기사본말체는 역대의 중요 사건별로 항목을 세워 그 전말(顚末)에 관한 사료를 수록하는 것이다.
근조선에 관한 기사본말체의 야사로는 서문중(徐文重)의 《조야기문(朝野記聞)》과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그 대표로 들 수 있는데, 이 둘 중 가장 체재가 잘 갖추어지고, 또 널리 유포된 것이 《연려실기술》이다.
《연려실기술》의 편저자인 이긍익은, 영조(英祖) 12년(1736년)에 출생하여 순조(純祖) 6년(1806년)에 71세로 돌아간, ―우리나라의 문예(文藝) 부흥기라 할 수 있는― 영ㆍ정(英ㆍ正) 시대의 학자이었다. 그의 자는 장경(長卿), 호는 연려실(燃藜室), 본관은 전주(全州)요, 근세 필가(筆家)로 유명한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아들이었다. 광사의 아들인 긍익은 국사에 비상한 관심과 취미를 갖고 널리 사서(史書)를 섭렵하였는데, 종래의 야사류가 너무도 산만하여 체계를 잃은 데 대해 큰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그는 근조선 태조(太祖) 이래 각 왕대(王代)의 중요한 사건(대개 정치적 사건)을 기사본말체적 방식에 의하여 편찬하되, 조금도 자기의 견해나 비평을 가하지 않고 다만 여러 사서에서 관계 기사를 초출(抄出)ㆍ기입하는 동시에, 일일이 출처를 밝히었다. 이것이, 《연려실기술》의 원집(原集)이다. 또한, 그는 따로 역대 관직을 위시하여 각종 전례(典禮)ㆍ문예(文藝)ㆍ천문ㆍ지리ㆍ변어(邊圉 대외관계) 및 역대 고전(歷代古典) 등, 크게 편목(篇目)을 나누어 그 연혁을 기재하고, 또한 출처를 밝히었다. 이것이 《연려실기술》의 별집(別集)이란 것이다. 원집을 정치편(政治篇)이라고 한다면, 별집은 분류편(分類篇)이라고 할 수 있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여러 군데에서 녹둔도(鹿屯島)에 대한 언급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 연려실기술 별집 제18권 / 변어전고(邊圉典故)
선조 병술년(1586)에 둔전(屯田)을 경흥(慶興) 녹둔도(鹿屯島)에 설치하였다. 정해년 가을에 시전번(時錢藩)의 오랑캐가 적호(賊胡)를 불러 모아 그곳에 사는 사람과 가축을 죽였다. 무자년 정월에 병사(兵使) 이일(李鎰)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시전번의 소굴을 소탕해 뒤집고 적의 머리 4백여 급을 베었다. 《고사촬요》
○ 그때 녹둔도에 오랑캐가 크게 들어와 사람을 거의 다 살육하니, 임금이 상심하여 친히 녹둔도에서 싸우다가 죽은 장사(將士)들을 애도하는 율시(律詩)란 제목을 내어 가까이 모시고 있는 신하들에게 명하여 지으라고 하니, 한준겸(韓浚謙)이 한림(翰林)으로서 1등을 했다. 그 끝 구절에,
“邊奏由來難盡實 九重寧悉此間寃
변방의 보고가 예로부터 모두 사실이기 어려운데
구중 궁궐에서 어찌 그 사이 억울함을 모두 알겠는가
하였으니, 그 말에 슬며시 풍자하는 의사가 포함되었다. 《지봉유설》
○ 연려실기술 별집 제17권 / 변어전고(邊圉典故)
진(鎭)ㆍ보(堡) 폐지된 진ㆍ보를 붙임
녹둔도 농보(鹿屯島農堡) 사흠마도(沙欠磨島)라고도 한다. 부의 남쪽 56리에 있는데, 토축이다.
○ 연려실기술 별집 제8권 / 관직전고(官職典故)
진보(鎭堡)
선조조에 경흥(慶興) 녹둔도(鹿屯島)에서 백성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경작하였는데, 오랑캐가 쳐들어와 거의 다 살육해 버렸다. 임금이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悼鹿屯島戰亡將士/녹둔도에서 전사한 장사를 애도한다는 어제(御題)를 내어 근시(近侍)하는 신하들에게 율시(律詩)를 짓도록 명하였다. 한준겸이 한림(翰林)으로서 그 시의 장원으로 뽑혔으니, 그 마지막 구에,
邊奏由來難盡實 변방에서 아뢴 바는 본래 다 실상으로 믿기 어렵다 하나니 /
九重寧悉此問冤 구중 궁궐 속에서 어찌 다 알리오 이 사이의 원통한 일을 /
하였다. 말 속에 은근히 풍자함이 있어 임금에게 고하는 체통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지봉유설》
또한, 이순신에 대한 기술 역시 빼놓을 수가 없기 마련이다.
○ 연려실기술 제18권 /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선조조의 명신
이순신(李舜臣)
조산 만호(造山萬戶)가 되어 정해년(1587)에 조정에서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였는데, 공이 그 일을 관장하게 되었다. 그 지역이 너무 멀고 병정이 적었기 때문에 누차 군사를 증가사켜 달라고 요청하였다. 8월에 비적(匪賊)이 전채(田寨 둔전 목책)를 습격하여 포위하자 공이 선두에 있는 붉은 털옷을 입은 자 수 명을 연속해서 사살(射殺)하고, 추격하여 잡혀가는 남녀 60여 명을 탈환하였다.한창 교전하다가 공이 화살에 맞았는데 몰래 스스로 화살을 뽑으면서 안색을 변하지 않아 온 군중에 아는 자가 없었다. 주장(主將)이 공을 잡아 영문에 이르러 장차 문초하려 하자 선거이(宣居怡)가 공이 죄를 면치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술을 권하여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하니 공이 정색(正色)을 하고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렸는데, 술은 마셔 무엇하겠소.” 하였다. 이 사건이 조정에 보고되자 임금이 말하기를, “순신은 싸움에 패한 따위가 아니니, 백의(白衣)로 종군(從軍)케 함이 옳다.” 하였다. 그해 겨울에 시전(時錢 지명)의 싸움에 공을 세워 풀려서 돌아왔다. 유사(遺事)
김춘산 (c4456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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