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산

이항복의 백사집과 김육의 잠곡유고에 나오는 녹둔도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선조ㆍ광해군 사이의 명재상이자, 국난을 극복한 공신으로 이름 높은 한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도 두루 알려진 인물이다. 실로 그는 공업(功業)과 문장(文章)을 아울러 이룩한 사대부의 빼어난 전형으로 볼 수 있다. 《백사집(白沙集)》은 이러한 그 자신의 체험적 기록이며, 정서적 표출인 동시에, 어렵고 복잡했던 시대에 대응한 논리가 잘 드러나 있는 내면의 형상이다.
《백사집》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문헌적 가치를 논의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하나는 ‘경세문장’적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기록적 산문의 성과이다. 전자는 국정에 참여하여 공훈을 세웠던 그 자신의 경력에 비추어 비중을 갖는 것인데 관료적 문학으로 규정될 성질의 것이다. 후자 역시 그 자신의 인생 역정의 보고문으로 마침 다사다난했던 시대, 동요하는 역사 상황의 중심에 서 있었던 까닭에 이 기록은 여러 모로 주목할 만하다. 더욱이 탁 트인 안목, 활달한 필치를 견지하여 기록에 가치를 받쳐 주고 있다. 그리고 이 백사집 제4권에는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의 유사(遺事)가 실고 있는데 조산 만호 시절 이 충무공이 겪었던 전투와 백의종군의 이야기를 실감나게 전해주고 있다.
“...........공은 을사년 3월 8일에 태어났는데, 점쟁이가 말하기를,
“나이 50이 되면 부월(斧鉞)을 가지고 북방에 출정(出征)할 것이다.”
고 하였다. 자라서는 유업(儒業)을 하였는데 글씨 쓰는 데에 더욱 뛰어났다. 그러다가 약관(弱冠)에 이르러서는 그 학문을 모두 그만두고 오로지 무사(武事)만을 배웠다. 병자년에는 무과에 합격하여 발포 만호(鉢浦萬戶)가 되었다가 파직되어 집에 있었다. 갑신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였고, 병술년에는 복(服)을 마치고 사복시 주부를 거쳐 조산 만호(造山萬戶)가 되었다.
정해년에는 조정에서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면서 공에게 그 일을 관장하게 하니, 공이 지역이 멀고 군사가 적다 하여 누차 군사를 늘려 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런데 그해 8월에 적(賊)이 전채(田寨)를 기습 포위해 왔는바, 홍전(紅氈)을 입은 적 수인(數人)이 가장 드러나게 앞에 있었으므로 공이 활을 연달아 쏘아 죽여서 물리친 다음, 전채를 열고 나가 추격하여 포로가 된 남녀 60여 명을 탈환하였다. 이때 한창 싸우다가 공이 유시(流矢)를 맞았는데, 남몰래 스스로 화살을 뽑아 버리고 낯빛도 동요하지 않았으므로 온 군중에서 그 사실을 아는 자가 없었다.
당시 주장(主將)이 공을 체포하여 영문(營門)으로 송치시켰는데, 장차 들어가 조사를 받게 되자, 친구 선거이(宣居怡)가 공이 죄를 면치 못할까 두려워하여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술을 권하여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 하니, 공이 정색하여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命)에 달린 것인데, 술은 무엇하러 마신단 말인가.”
하였다. 그리고 조사를 받음에 미쳐서는 공이 복죄(服罪)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군사가 적다는 것으로써 누차 보고하여 늘려 주기를 청했었다.”
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상이 이르기를,
“모(某)는 패군(敗軍)의 무리가 아니니, 백의(白衣)로 종군(從軍)하게 하라.”
하였다. 그런데 그해 겨울에 시전(時錢)의 싸움에 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방환(放還)되었다..........”
잠곡(潛谷) 김육(金堉)은 조선왕조 오백년 역사상 유명한 재상 중의 한 명인데 많은 저술과 편찬물을 남겼으며 문집으로는 《잠곡유고(潛谷遺稿)》가 있다. 이 문헌에 통제사(統制使) 이 충무공(李忠武公)의 신도비명이 들어있다. 내용은 《백사집》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공이 건원보에 있는 동안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 분상(奔喪)하고 왔으며, 삼년상을 마치고 곧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가 되었다가 겨우 보름 만에 다시 조산 만호(造山萬戶)에 제수되었다. 순찰사(巡察使) 정언신(鄭彦信)이 녹둔도(鹿屯雁)에 둔전(屯田)을 개설하고 공을 시켜 겸하여 관할하게 하였다.
공은 둔전의 군사가 적다고 하면서 여러 차례 수자리 군사를 더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병사 이일(李鎰)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가을이 되어 과연 오랑캐들이 대거 침입해 왔다. 공은 힘써 싸워 이들을 막아 내고 그 괴수를 쏘아죽인 뒤, 그대로 추격하여 사로잡힌 둔전 군사 60여 명을 빼앗아 돌아왔다. 그런데도 병사는 공을 죽여 자신의 잘못을 모면하려고 하여, 장차 영문(營門)에서 공의 목을 베려고 하였다.
군관(軍官) 선거이(宣居怡)가 공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술을 권하며 진정시킬 적에 공은 정색하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모두 천명에 달린 것이거늘 술을 마셔서 무엇 하겠는가.” 하고는, 뜰 안으로 들어가 항변하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아니하였다. 그러자 병사도 기운이 꺾여 공을 수금하고서 계문(啓聞)하였다. 상께서는 공에게 죄가 없음을 살피시고 죄를 인 채 종군(從軍)하게 하였다가 얼마 뒤에 다시 오랑캐의 목을 바친 공로로 용서하였다......"
김춘산 (c4456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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