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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舜臣, 백의종군의 아이콘 

 

  녹둔도사건에 대한 서술은 사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우선 『선조수정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녹둔도의 둔전은 흉년으로 수확이 좋지 않았는데, 마침 조산보 만호 이순신에게 녹둔도를 경영하게 하자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이에 경흥부사 이경록 (李慶祿), 조산보 만호 이순신이 군리(軍吏)를 모아 추수를 감독하였다. 그런데 이때 추도(楸島)의 여진 추장[胡酋] 마니응개(亇尼應介)가 공격하였고, 우리측 10여 인을 살해하고, 160인을 포로로 사로잡아 갔다. 여진족의 마니응개도 수장(戍將) 이몽서(李夢瑞)에게 사살되었지만, 조선 측의 피해가 너무 컸다."

 

  또 제승방략(制勝方略)』에는 당시 전투 상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니응개와 사송아(沙送阿)등이 녹둔도의 방어가 고립되고 약한 것을 보고 농민들이 들판에 나가 흩어져서 일할 때 여러 여진족을 규합하여 쳐들어와 약탈했다. 이에 여러 장수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지만, 둔전 목책을 뚫고 약탈하는 여진족을 방어하기가 어려웠다. 한편, 추장 마니응개를 이몽서가 화살로 쏘아 죽여서 여진의 군사를 후퇴시켰다. 이에 이순신과 이경록이 그들의 뒤를 공격하여 농민 50여 명을 되찾아 돌아왔고, 적 3인의 머리를 베었으며, 말 1필을 빼앗아 돌아왔다. 뒤이어 겨울에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이 우후(虞候) 김우추(金遇秋) 등과 함께 4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추도(楸島)를 습격하여 적 33명을 죽였다."

 

  다소 차이는 있으나 여러 기록들을 살펴봐도 사후 반격으로 일부 군민들을 되찾기는 했으나 기습에 대한 방비에 문제가 있는 전투이자 뒷수습인 것은 분명했다. 북병사(北兵使) 이일은 이를 두고‘ "적호(賊胡)가 녹둔도의 목책(木柵)을 포위했을 때 경흥 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과 조산 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 군기를 그르쳐 전사(戰士) 10여 명이 피살되고 1백 60명의 인명과 15필의 말이 잡혀갔습니다. 국가에 욕을 끼쳤으므로 이경록 등을 수금(囚禁)하였습니다."라고 치계를 올렸다. 그리고 이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이경록·이순신을 극형에 처하여야 한다고 조정에 건의하였다. 물론 좀 더 꼼꼼히 들여다 보면 병력 증원을 제때에 하지 않은 자신의 잘못을 이순신에게 덮으려 하였다고 북병사 이일을 비난할 이유도 있어 보인다.

  ‘수책거적’ 《북관유적도첩》, 조선 17~18세기, 41.2×31cm, 종에 엷은 채색, 고려대학교 박물관    결과적으로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있었음에도 이경록과 이순신에게 참수와 같은 극형은 처해지지 않았다. 경흥부의 녹둔도가 야인 지역과 너무 가까워 처음부터 소수의 병력으로 방어하기 힘들었음을 이미 조정은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이경록과 이순신 등을 서울로 압송하여 재판에 회부할 것을 청하자, 선조는 이순신과 이경록의 보고를 종합한 결과 이순신이 열세한 상황에서 충분히 분전했음을 인정하고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북병사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고 전교하였다. 또한 당시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한 병조판서 정언신(鄭彦信)도 빈번한 여진족의 침입을 이유로 사의를 거절하였다.

이 사건으로 경흥 부사 이경록과 조산 만호 이순신은 곤장 1백대를 맞은 후, 이듬해 1588년(선조 21)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이 시전(時錢) 부락의 하오랑아(何吾朗阿)를 정벌할 때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제1차 전투에서 패한 아군은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여 2차 출정을 준비하였다. 1588년1월 북병사 이일 등은 군사를 이끌고 추도(楸島)를 습격, 적 33명을 죽였다. 한편으로는 길주 이북의 여러 진병과 중앙의 장수가 합세하여 2,500여 기의 군대로 출전에 나섰다. 회령부사 변언수, 은성부사 양대수, 부령부사 이지시 등을 각각 선봉장으로 하여 여진족의 4개 부락을 향하였다. 삼경에 두만강을 건너 다음 날인 15일 날이 밝자마자 일제히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정벌에서 여진부락 200여 호를 불태우고 적 380명을 죽였으며, 말 9필, 소 20두를 획득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아군의 희생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당시 백의종군한 이경록과 이순신은 여진 추장인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생포하는 전공을 세워 백의종군에서 사면을 받기도 하였다.

이같은 대대적인 여진 토벌은 역사상 여진 토벌 중에서 그 전과가 가장 빛나는 획기적인 것이었으며, 녹둔도 침입에 대한 제2차 정벌로서 아군의 장쾌한 대첩으로 평가된다. 


이후 이 정벌에 참여해 전과를 올린 장수와 병사들은 그 뒤 임진왜란이라는 커다란 국난 극복에 여지없이 힘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제법 혹독한 신고식을 치른 이순신은 이후 파격적 승진을 거듭하며 조선 500년사에 빛나는 구국의 영웅으로서의 프로필을 준비하게 된다.


김춘산 (c4456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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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10-31 16:38:36
  • 수정 2022-11-01 10: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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