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산
저 건너에는 야인이 산다네
북방의 여진족은 전투력이 강한 아주 무서운 민족이었다. 조선은 건국초기부터 번호(藩胡)들을 이용하여 거친 여진족들을 통제하였다. 번호(藩胡)라는 말은 우리나라 영토의 ‘울타리 노릇을 하는 오랑캐’라는 뜻으로 조선에 항복한 여진족이다. 번호들은 조선 가까이 살면서, 조선으로부터 농산물, 농기구, 면포 등을 지급받고 정착생활을 하였는데, 조선과 여진 사이에 완충지역으로서, 대규모 여진족 침공의 조기경보기 역할을 하였고, 여진족에 대한 정보를 조선조정에 전달해 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겉으로는 우리나라에 조공(朝貢)하고 복속(服屬)하는 체하지만, 기회만 있으면, 만주 내지(內地)의 오랑캐족과 우디케족을 끌어들여 조선의 5진(鎭)의 진보(鎭堡)를 침입하여 약탈하였다. 즉, 언제 돌변하여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불안한 공존관계였던 것이다. 때문에 녹둔도에 대한 대책에 대해서는 조정에서도 항상 논의가 분분했다.
1583년 선조는 함경도 감사 鄭彦信의 건의에 따라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 녹둔도 내 둔전(屯田)을 설치케 하면서 오랑캐 마을과 너무 근접하므로 방책을 세우게 했으나 번호(藩胡) 니탕개의 반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1587년(선조 20) 경흥 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은 다시 두만강 하류에 있는 삼각주섬인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녹둔도와 가장 가까운 조산보(造山堡) 농민들에게 섬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게 하였는데, 이때 농사짓는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섬 안에는 길이 1,246척의 토성(土城)을 쌓고 높이 6척의 목책(木柵)을 세워 여진족의 침입을 방어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이 녹둔도에 상주하는 것은 아니었고 조산보의 병사가 방어하는 가운데 농민들이 배를 타고 섬을 오가며 농사를 짓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 둔전을 관리하는 둔전관의 임무를 이순신에게 맡긴다.
《북관유적도첩》에 실린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에 관한 글과 그림
이순신과 녹둔도
몇 년전 드라마 방영으로 이제는 제법 알려지게 된 것처럼 이순신 장군의 이름이 역사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사실 옥포해전이나 한산도대첩이 아니라 녹둔도 사건이다. 해전(海戰)이 아니라 여진족을 상대로 한 북방 깊숙한 변경에서의 육전(陸戰)이라는 점이 눈길을 끄는데 특히 왜란에서 보여준 23전23승의 완벽한 신화라기 보다는 기습으로 인한 패배와 처절한 분투, 그리고 백의종군과 반격으로 기록되는 다소 진땀나는 전투라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이 때 이순신은 한 해전 삼년동안의 부친상을 마친 후 조산보만호로 보임받은 상태에서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게 된다. 즉, 조산보에서 여진족이 침략하는 길목을 방어함과 동시에 한참 아래 녹둔도로 이동하여 군량을 생산하고 농민을 지켜야 하는 2가지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이 당시는 여진족의 세력이 팽창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충무공 이순신은 적은 병력으로 2가지 임무를 하는 것에 어려움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녹둔도가 멀고 고립됐다며 여러차례 함경도 북병사 이일에게 병력 충원을 요청했으나 어떠한 이유인지 계속 충원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해 가을, 조산보의 농민들이 녹둔도에 들어가서 추수를 할 때 인원을 보낸 상황에서 여진족의 침입이 발생했다.
5진(鎭)의 번호(藩胡) 가운데 시전(時錢)부락에 살던 번호(藩胡) 하오랑아(何吾朗阿)가 만주 내지의 우디캐족을 끌어들여, 녹둔도에 침입한 것이다. 농산물을 약탈하는 이들과 조선 사이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녹둔도를 지키던 조선의 군사들은 용감히 항전하였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숫자가 부족한 가운데 벌어진 전투에서 여진족을 방비하던 수호장(守護將) 오형(吳亨), 감관(監官) 임경번(林景藩) 등 11명의 군사가 살해되고, 군민(軍民) 160명을 납치당했으며, 말 15필을 약탈당했다.
이때 경흥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은 조산 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힘을 다해 오랑캐와 싸워 녹둔도에 침입한 오랑캐를 물리쳤으나, 서로 공방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엄청난 살상전이 벌어졌다. 당시 오랑캐의 병력은 많았으나, 경흥부사 이경록과 조산 만호 이순신이 거느린 군사는 고작 2백 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근처에 있던 진(鎭)에서도 제때에 군사를 출동하여 구원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오랑캐를 물리치기는 하였으나, 우리 군사의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군관 김몽호(金夢虎)는 여진족의 뜻하지 않은 기습에 의한 무자비한 만행으로 희생된 11명의 처참한 광경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격분한 조선군은 보복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녹둔도를 관할하던 함경도 경흥부 부사(府使) 이경록(李慶祿)과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을 선봉으로 하여 제1차 정벌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포로 160여명을 구출하고 소수의 적을 죽이기는 하였으나 아군의 피해 역시 엄청나게 컸다. 북병사 이일(李鎰)은 이 사건의 결과를녹둔도함몰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김춘산 (c4456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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