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산
이순신 장군 동상
조선왕조실록 속의 녹둔도(5)
북방의 적호를 사로잡거나 회유할 때조차도 비변사라는 군무의결기관과 긴밀하고 상세하게 임기응변술이나 병법 등 전술, 전략을 의논하고 사후를 도모한 점이 매우 눈에 띈다. 비단 녹둔도 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분야에 대한 보고와 하유(下諭)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왕들이 만기친람(萬機親覽)한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선조 20년 12월 28일 임오
비변사가 북도 오랑캐를 처리하는 일에 관해 비밀히 입계하다
비변사가 비밀히 아뢰기를,
"전번에 본도(本道)의 병사(兵使)의 계문(啓聞)에 따라 ‘본부(本府)가 적호(賊胡)를 사로잡고자 도모할 적에 만약 일의 기미가 이미 누설되었다면 중도에서 잡아 가두고 만일 누설된 일이 없고 적의 괴수를 데려올 길이 있다면 돌아가도록 허용하여 후사(後事)를 도모하라.’는 뜻으로 회계하여 이를 벌써 하유(下諭)했으니, 병사는 반드시 참작하여 시행할 것입니다. 다만 중도에서 잡아 가두는 일은 과연 온당치 않기에 지금 ‘만일 누설된 일이 없을 경우에는 전번 공사(公事)에 따라 돌아가도록 허용해 주고, 만약 누설되었다면 할 수 없이 사로잡게 되더라도 또한 중도에서 잡아 가두지는 말라. 계문에 의거하여 그들이 장차 관문을 나올 때 군문(軍門)으로 잡아와 변방에서 들었던 것을 가지고 득실(得失)을 끝까지 캐물어 자백을 받아 정죄(定罪)하고, 복죄(服罪)되는 자들로 하여금 이것이 속임수로 잡으려는 꾀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주지시키라.’고 회유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리에 맞을 듯합니다. 병사에게 아울러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뛰어난 병법이나 비상한 임기응변술에 대해서는 나의 얕은 지혜로 헤아리지 못할 바이나 본연(本然)의 권도(權度)로 추구해보면 또한 다소 이를 말이 있다......... 저 두 오랑캐가 녹둔도(鹿屯島)에 침범해 왔다는 것은 사실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고, 변방의 근거 없는 낭설에 불과할 따름이다. 만에 하나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원통함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두 오랑캐의 머리를 얻으려다가 수많은 오랑캐들의 마음을 잃을 것이니, 곡직(曲直)과 경중(輕重)이 관계된 바가 작지 않다. 정원(政院)은 매우 중요한 자리이니 나라를 위한 훌륭한 계책을 잘 마련하기를 깊이 기대하고 있다. 정확한 의논을 듣고자 하니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선조 21년 1월 10일 갑오
문신에게 시제를 내어 제진토록 하다.
‘과녹둔도전장유감(過鹿屯島戰場有感)’을 어제(御題)로 내어 칠언율(七言律) 2수(首)를 정원(政院)·옥당(玉堂)과 한림원 주서(翰林院注書) 등에게 제진(製進)하도록 명하였는데, 검열(檢閱) 한준겸(韓浚謙)이 수석을 차지하여 아다개(阿多介)025)를 하사하고, 그 이하는 차례대로 상(賞)을 주었다.
선조 21년 1월 27일 신해
북병사가 녹둔도에서 변을 일으킨 오랑캐를 분탕했다고 보고하다
북병사(北兵使)의 계본(啓本)에, 경원(慶源)의 번호(藩胡) 중 녹둔도(鹿屯島)에서 작적(作賊)한 시전 부락(時錢部落)에 이달 14일에 본도(本道)의 토병(土兵) 및 경장사(京將士) 2천 5백여 명을 거느리고 길을 나눠 들여보내, 이경(二更)에 행군하고 삼경에 강을 건넜다가, 15일 평명(平明)에 그들의 궁려(穹慮)032) 2백여 좌(坐)를 분탕(焚蕩)하고 머리 3백 80급(級), 말 9필, 소 20수(首)를 참획(斬獲)하고 전군(全軍)이 무사히 돌아왔다고 하였다.
김춘산 (c44567@naver.com)
ⓒ아리랑타임즈 -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arirangtimes.com/news/view.php?idx=1840